더비 카운티 FC

 









'''더비 카운티 FC'''
'''Derby County F.C.'''
'''정식 명칭'''
Derby County[1] Football Club
'''애칭'''
양들 (The Rams)
'''창단'''
1884년
'''소속 리그'''
'''EFL 챔피언십 (EFL Championship)'''
'''연고지'''
이스트 미들랜즈 더비셔더비 (Derby)
'''홈 구장'''
프라이드 파크 스타디움 (Pride Park Stadium)[2]
(33,597명 수용)
'''라이벌'''
'''노팅엄 포레스트 FC''' - 이스트 미들랜즈 더비
'''레스터 시티 FC''' - 이스트 미들랜즈 더비
'''구단주'''
[image] 멜 모리스 (Mel Morris)
'''감독'''
[image] 웨인 루니 (Wayne Rooney)
'''주장'''
공석
'''부주장'''
[image] 커티스 데이비스 (Curtis Davies)
'''클럽 앰버서더'''
[image] 로이 맥팔랜드 (Roy McFarland)
[image] 로저 데이비스 (Roger Davies)
[image] 마이클 존슨 (Michael Johnson)
[image] 마크 에드워디 (Marc Edworthy)
'''공식 홈페이지 및 소셜미디어'''

'''팬 카페'''

'''우승 기록'''
'''프리미어 리그 (1부)'''
(2회)

1971-72, 1974-75
'''EFL 챔피언십 (2부)'''
(4회)

1911-12, 1914-15, 1968-69, 1986-87
'''EFL 리그 1 (3부)'''
(1회)

1956-57
'''FA 컵'''
(1회)

1945-46
'''FA 커뮤니티 실드'''
(1회)

1975-76
'''클럽 기록'''
'''최고 이적료 영입'''
[image] 크리스티안 비엘리크 (Krystian Bielik)
(2019년, From 아스날 FC, 850만 £)[3]
'''최고 이적료 방출'''
[image] 마테이 비드라 (Matěj Vydra)
(2018년, To 번리 FC, 1100만 £)
'''최근 영입'''
[image] 패트릭 로버츠 (Patrick Roberts)
(2021년, From 맨체스터 시티 FC, 임대)
'''최근 방출'''
[image] 모건 위태커 (Morgan Whittaker)
(2021년, To 스완지 시티 AFC, 70만 £)
'''최다 출장'''
[image] 케빈 헥터 (Kevin Hector) - 589경기[4] (1966-1978 / 1980-1982)
'''최다 득점'''
[image] 스티브 블루머 (Steve Bloomer) - 332골 (1891-1906 / 1910-1914)
'''1부 리그 득점왕'''
(7회)
[image] 스티브 블루머 - 5회 (1895-96, 1896-97, 1898-99, 1900-01, 1903-04)
[image] 잭 보워스 - 2회 (1932-33, 1933-34)
'''2부 리그 득점왕'''
(2회)
[image] 알프 벤틀리 - 1회 (1908-09)
[image] 마테이 비드라 - 1회 (2017-18)
'''3부 리그 득점왕'''
(1회)
[image] 레이 스트로 - 1회 (1956-57)[5]

1. 소개
2. 역사
3. 최근 시즌
3.1. 프리미어 리그 역대 최악의 2007-08 시즌
3.2. 2013-14 시즌
3.3. 2014-15 시즌
3.4. 2015-16 시즌
3.5. 2016-17 시즌
3.6. 2017-18 시즌
4. 1군 선수단
5. U-23 선수단
6. 라이벌
7. 여담
8. 유명 팬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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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잉글랜드 더비에 연고지를 둔 축구 클럽으로 1884년 더비셔 CCC의 분파로 창단하여 135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풋볼 리그의 원년부터 참여한 열두 구단 중 하나로, 클럽의 상징색으로는 흰색과 검정색을 사용하였다. 단 4시즌을 제외하고 모든 시즌을 1부리그와 2부리그에서만 보냈다. 최대 전성기는 2번의 리그 우승을 했던 1970년대였다.

2. 역사


1884년 더비셔 CCC의 분파로 창단되었다. 그 해 크리켓 팀은 챔피언십 대회에서 처참한 성적을 내며 수익이 줄어들었는데 이미 더비 지역에는 더비 미들랜드 FC[6]라는 1883년에 창단한 또다른 축구 팀이 있었고 1884년에 열린 더비셔컵 결승에서 7,000명의 관중을 모으며 지역에서 인기를 끌었다. 은행원이었던 윌리엄 몰리(William Morley)와 그의 지지자들은 수익을 추가로 창출하고 겨울에는 크리켓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겨울에도 관중들을 모으기 위해 축구팀을 창설하기로 결심을 했다. 1883년에 창설된 더비셔 축구협회에 크리켓 팀과 관련성을 강조하여 '더비셔 카운티 FC'라는 이름으로 창단 신청을 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너무 길다는 이유로 기각되었고 대신 '더비 카운티'라는 이름으로 창단하게 되었다. 팀 명칭에 카운티가 붙은 이유는 홈구장이 크리켓 경기장이었던 '카운티 그라운드(다른 이름으로 레이스코스 그라운드)'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유니폼 디자인은 호박색, 초콜릿색, 청색이었다.
이후 더비 카운티는 크리켓 경기장에서 축구를 했고 창단 첫 경기는 1884년 9월 13일 그레이트 리버(Great Lever)와의 친선경기였는데 6대0 완패로 끝났다. 최초의 공식 경기는 1884년 11월 8일 FA 컵에서 월솔 타운을 홈에서 상대했는데 이 역시 7:0으로 대패로 끝났다. 하지만 그 다음 대회에선 버밍엄 세인트 조지스와 아스톤 빌라를 꺾으며 FA컵 3라운드에 진출했는데 풋볼 리그의 창설자에 관여했던 윌리엄 맥그리거가 아스톤 빌라의 디렉터였고 이 승리로 인해 그의 눈에 들어 1888년에 창설된 역사적인 풋볼 리그 12개 팀의 일원으로 초대받을 수 있었다. 첫 번째 리그 경기였던 볼튼 원더러스 원정에서 3:0으로 지다가 6:3 역전승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풋볼 리그는 12팀 중 10위로 마쳤다. 1891년에는 더비 지역의 다른 축구팀인 미들랜드 리그 소속의 더비 미들랜드 FC를 합병하며 더비 지역의 유일한 축구팀이 되었다. 1892년 풋볼 리그와 라이벌 리그였던 풋볼 얼라이언스와 합병하여 풋볼 리그는 2부리그 체계로 변경되었는데 이때 풋볼 얼라이언스의 상위 세 팀이었던 이웃 도시 노팅엄을 연고로 하는 노팅엄 포레스트와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1894년부터 지금의 블랙 앤 화이트 유니폼이 채택되었고 1895년에는 카운티 그라운드를 떠나 베이스볼 그라운드로 홈구장을 옮겼다.[7] 이 시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선수는 스티브 블루머였다. 그는 원래 더비 미들랜드 FC 소속이었으나 더비 카운티와 합병하면서 더비 카운티 소속이 되었고 1891년부터 1906년까지 15년 동안 525경기 331골(리그 474경기 293골)을 기록했다. 디비전 1 득점왕을 5차례나(1896, 1897, 1899, 1901, 1904) 수상하며 잉글랜드 최고의 공격수로 맹위를 떨쳤다. 그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더비의 디비전1 성적은 별볼일이 중위권을 맴돌았다. 1895-96 시즌에는 아스톤 빌라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하고 그 다음시즌에 3위를 차지한게 전부였다. FA컵에서는 1898년, 1899년, 1903년 세 차례 결승에 진출했지만 모두 결승에서 노팅엄 포레스트, 셰필드 유나이티드, 베리 FC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쳐 우승에 실패했다. 그리고 1900년대 초 재정 문제로 블루머를 미들즈브러 FC에 팔아야 했고 결국 공백을 메우지 못하며 1906-07 시즌 20개 팀 중 19위에 그쳐 역사상 처음으로 디비전 2로 강등되고 말았다.
5년을 디비전 2에서 보내다가 블루머가 리턴한 1911-12 시즌 디비전 2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디비전 1에 복귀했다. 그러나 1912-13 시즌을 7위로 마친 뒤 곧바로 1913-14 시즌에 블루머의 노쇠화와 함께 디비전 1을 꼴찌로 마감하며 최하위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1914-15 시즌 디비전 2에서 우승하며 1년 만에 재승격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풋볼 리그가 취소되었다. 그리고 두 시즌 만인 1920-21 시즌 또 강등되었다. 평범한 2부리그 팀이 되어가던 더비는 1925년 조지 조베이 감독이 부임하며 전환점을 맞는다. 그의 부임 후 한 시즌 만인 1925-26 시즌 디비전 2에서 준우승으로 승격을 이루어냈으며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준우승 두 차례(1929-30, 1935-36)를 포함하여 안정적으로 디비전 1에 안착하게 되었다.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중상위권을 유지하던 더비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리그가 중단되는 위기를 맞이했지만 지역 리그에서 여전히 강팀으로 활약했고 1946년 FA컵에서 찰턴 애슬레틱을 4:1로 꺾고 우승하며 첫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리그가 1946년 재개된 뒤 1947-48 시즌과 1948-49 시즌 4위와 3위를 차지한 뒤 급격한 내리막길을 겪었고 결국 1952-53 시즌 22개 팀 중 꼴찌로 27년 만에 디비전 2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54-55 시즌에는 디비전2에서 또 22위에 그쳐 역사상 처음으로 3부리그인 디비전 3으로 내려가는 굴욕을 겪었다. 그 후 1956-57 시즌에 디비전 2로 올라오긴 했지만 이후 10년 간 디비전 2에만 머물러야 했다.
1967년에 샘 롱슨(1989년 작고)과 브라이언 클러프가 회장과 감독으로 각각 취임하였다. 클러프는 평범한 선수였던 피터 테일러를 수석코치이자 스카우터로 삼았고 로이 맥팔랜드, 존 오헤어, 존 맥거번, 앨런 힌튼, 레스 그린, 케빈 헥터 등의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전력을 강화시켜 1968/69 시즌에 디비전 2에서 우승하여 16년 만에 디비전 1으로 승격했다. 그리고 디비전 1으로 돌아온 첫 시즌인 1969-70 시즌 4위를 기록했고 2년 뒤인 1971-72 시즌 디비전 1에서 창단 처음으로 1부리그에서 우승했다.[8] 그리고 그 다음 시즌인 1972-73 시즌 유러피언컵에 준결승까지 오르기도 했으며 준결승에서 유벤투스에 1:3으로 지며 결승행은 아쉽게 좌절되었다. [9] 그러나 클러프 감독의 유명한 성질머리가 문제가 되어 보드진과 불화가 생겼고 1973-74 시즌 초반 부진하자 클러프 감독과 테일러 코치가 차례로 떠났다.
클러프의 사퇴 이후 그의 뒤를 이은 데이브 맥케이가 팀을 이끌며 1974-75 시즌에 4년 만에 디비전 1에서 우승을 되찾았다. 그러나 1975-76 시즌 4위를 기록한 것까진 좋았으나 1976-77 시즌 갑자기 강등 위기에 몰리자 맥케이 감독 역시 클러프 감독과 마찬가지로 우승 후 2년이 채 안되어 감독 자리를 내려놓게 되었다. 리저브팀 감독이던 콜린 머피와 맨유를 이끌었던 토미 도허티가 감독직을 맡고도 하위권에서 맴돌았고 콜린 보울튼, 콜린 토드, 아치 제밀, 케빈 헥터, 찰리 조지, 레이튼 제임스 등 영광의 멤버들도 하나둘씩 팀을 떠나기 시작했다. 도허티가 떠난 뒤 첫 시즌인 1979-80 시즌 결국 11년 만에 디비전 2로 강등당했다. 디비전 2에서도 승격과 거리가 먼 행보와 관중 감소로 인해 재정난에 시달렸고 1983년 초 과거 수석코치였던 피터 테일러가 부임했으나 오히려 1983-84 시즌에는 다시 한 번 3부리그로 추락하고 말았다.
1부리그에서 우승한지 10년도 안되어 3부리그까지 떨어지고 파산 위기까지 몰린 상황에서 구원자가 나타났다. 옥스포드 유나이티드의 회장을 지낸 언론재벌 로버트 맥스웰[10]이 구단을 인수해서 파산 위기를 넘겼고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1부 리그로 승격시킨 바 있는 아더 콕스가 감독직에 취임하여 리빌딩을 시작해 1985/86 시즌과 1986/87 시즌에 백투백 승격에 성공하며 7년 만에 1부리그로 승격했다. 연속된 호성적에 관중도 늘어나 재정 상태가 나아졌고 맥스웰 회장은 피터 쉴튼, 마크 라이트, 딘 손더스, 트레버 헤버드, 테드 맥긴 등을 폭풍 영입하여 잠깐 화제를 모았고 승격 후 두 번째 시즌인 1988-89 시즌에 5위를 했으나 구단주의 애정이 식으면서 투자가 줄어들자 다시 리그에서는 부진을 거듭하여 결국 1990-91 시즌 막판에 맥스웰 회장이 손을 떼고 난 뒤 결국 강등되었다. 강등 이후 지역 언론사업가였던 리오넬 피커링이 클럽의 대주주가 되며 맥스웰 회장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신임 회장이 되었다.
피커링 신임 회장은 여러 선수를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다. 1993년 10월 아서 콕스 감독이 사임하자 클럽 레전드였던 로이 맥팔랜드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1993-94 시즌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에 올랐으나 라이벌인 레스터 시티에 패했고 다음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자 맥팔랜드 감독은 경질당했다. 그리고 그의 후임으로는 4차례의 승격을 이끌어내며 승격 전도사인 짐 스미스를 선임했다.
1995-96 시즌 초반 스타트는 좋지 않았지만 크로아티아 국가대표 센터백 이고르 스티마치를 깜짝 영입한 것이 효과를 봤다. 스미스 감독은 더비 카운티를 2부리그 준우승로 이끌며 5년 만의 1부리그 복귀에 성공했다. 프리미어리그로 명칭이 바뀐 이후로 처음으로 PL에 참가하게 되었다.
1996-97 시즌 프리미어리그 12위로 마감하며 안정적으로 프리미어리그에 안착했고 시즌 막판에는 해당 시즌 우승팀이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원정에서 시즌 막판에 영입된 파울로 완초페의 데뷔전 원더골로 3:2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즌을 끝으로 102년 동안 사용했던 베이스볼 스타디움에서의 시간을 마감하고 현재의 프라이드 파크 스타디움으로 홈구장을 이전했다.
새 홈구장에서의 첫 시즌이었던 1997-98 시즌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짝이었던 ACF 피오렌티나의 프란체스코 바이아노를 영입했고 그는 클럽 최고 타이기록인 6경기 연속 리그 득점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했다.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셰필드 웬즈데이에 5:2 대승을 거두며 61년 만에 승리하기도 했다. 시즌 중반까지 프라이드 파크에서 맨유에 2대2 무승부, 아스날에 3대0 대승 등 무패행진을 이어나가며 유럽대항전 진출권에 머물렀으나 홈 첫패 이후 후반기에 페이스가 떨어지며 7위 아스톤 빌라에 승점 2점 차이인 9위로 마감했다. 시즌이 끝나고 열린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5명이 더비 카운티 소속으로 월드컵에 출전하였다.[11]
1998-99 시즌 수비수 크리스티안 데일리가 블랙번으로 당대 더비의 최다 이적료 방출 기록이었던 535만 파운드에 이적했고 수석코치로 들였던 스티브 맥클라렌에 시즌 도중 퍼거슨의 부름을 받고[12] 맨유로 떠나는 일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초반 2위에 오르기도 했고 강등 걱정 없이 전 시즌보다 더 좋은 8위로 마감했다. 70년대 이후 처음으로 1부리그에서 연속 TOP 10. 리버풀 FC를 상대로 홈어웨이 더블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더비의 좋았던 시절이었고 곧바로 재정 문제라는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재정 문제로 인해 주축 선수들을 대거 이적시켜야 했다. 1999-00 시즌 전과 도중에 이고르 스티마치와 파울로 완초페를 웨스트햄에, 리 카슬리를 블랙번에 팔아야 했고 리 카슬리는 시즌 도중 팀을 떠났다. 7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루 알렉산드라의 셋 존슨과 CA 콜론의 에스테반 푸에르테스를 영입하는데 그쳤고 그나마도 푸에르테스는 영국 이민청에서 그의 이탈리아 여권이 위조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비자가 취소, 8경기 1골에 그치며 이적해야 했다. 결국 전력 악화와 함께 17경기에서 단 3승에 그치며 강등 위기에 몰리자 800만 유로에 크레이그 벌리와 브란코 스트루파르, 리 모리스를 대거 영입했다. 시즌 종료 직전에는 아약스로부터 과거 맨시티 소속의 킨클라제까지 임대로 데려오며(후에 300만 유로로 완전이적) 강등 위기 탈출을 위해 안간힘을 썼고 결국 그 효과를 보며 간신히 강등권에 승점 5점 차인 15위로 강등 위기를 넘겼다. 헹크에서 온 벨기에 국가대표의 스투르파르는 프리미어리그 새천년 첫골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2000-01 시즌, 지난시즌 후반기의 선전과 함께 90년대 후반대의 성적으로 되돌아가리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첫 승을 신고하는데 14경기나 걸리며 또다시 하위권에서 맴돌았다. 시즌 막판 올드 트래포드 원정에서 챔피언 맨유를 상대로 깜짝 1:0 승리를 거두며 17위로 잔류할 수 있었다.
2001-02 시즌에 라치오로부터 과거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소속의 파브리치오 라바넬리를 SS 라치오로부터 영입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개막전에서 블랙번을 상대로 2:1로 8년 만에 승리했으나 7경기에서 승점 5점으로 부진하자 더비를 오랫동안 이끌던 짐 스미스는 단장직도 거부하고 6년 만에 감독 자리에서 자진 사퇴했다. 스미스의 후임으로 수석코치이자 과거 더비의 레전드였던 콜린 토드가 후임이 되었지만 성적은 오히려 더 추락하며 15경기 4승에 그쳤고 FA컵에서 4부리그 팀인 브리스톨 로버스에 홈에서 3:1로 패배하자 불과 98일 만에 경질당했다. 토드는 더비 역사상 최단시간 감독의 불명예를 얻고 말았다. 토드의 후임은 과거 더비 카운티 소속 선수이자 아스톤 빌라를 상위권으로 이끌며 잉글랜드 감독 물망에도 올랐던 존 그레고리였는데 그는 덕 앨리스라는 빌라의 악덕 구단주와의 불화에 지쳐 빌라를 떠나 더비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레고리 감독 부임 후 초반에는 나름 승점을 쌓으며 강등권 탈출의 희망을 품는가 했지만 곧바로 7연패의 수렁에 빠지며 결국 6년 만에 19위로 2부리그인 디비전 1으로 강등되었다.
강등 이후 더비 카운티는 재정난에 시달리며 주축 선수들을 이적시장에서 대거 이적시켜야 했고 선수 영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며 2부리그에서도 하위권에 처지게 되었다. 결국 존 그레고리 감독은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고 입스위치의 돌풍으로 이끌었던 조지 벌리가 신임 감독이 되었다. 2002-03 시즌은 디비전 1에서도 18위로 간신히 강등을 면했고 2003-04 시즌에도 여전히 재정난에 시달리며 최종전에서 간신히 강등권에 승점 1점 앞선 20위로 잔류했다. 라바넬리와 킨클라제, 크레이그 벌리와 같은 빅네임들이 시즌 도중 팀을 떠났고 자유계약으로 데려온 선수들과 8명의 임대생들로 충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강등 위기의 더비를 구출한 선수는 훗날 에버튼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는 에버튼에서 임대온 리온 오스만이었다. 그리고 잉글랜드 연령별 대표팀 골키퍼에 선발되었던 만 19세에 불과했던 리 그랜트 골키퍼가 좋은 활약을 했다.
2004-05 시즌에는 여전히 영입 자금이 없는 가운데 자유계약으로 데려온 라시아크와 이디아케스, 토미 스미스, 그리고 유스의 리 그랜트, 파블로 밀스, 톰 허들스톤, 마커스 투드게이의 맹활약으로 4위로 마감하며 강등 이후 3년 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 1,2차전 합계 0:2로 패하며 3년 만의 승격 도전은 좌절되었다. 시즌 후 조지 벌리 감독은 톰 허들스톤이 그의 상의 없이 토트넘 이적한 것에 대한 불만 등 보드진과의 불화로 사임하고 볼튼 원더러스의 코치였던 필 브라운[13]이 감독을 맡게 되었다. 이 무렵 구단 부채는 3000만 파운드가 넘었고 홈구장인 프라이드 파크 스타디움 소유권도 파나마의 ABC Corporation이라는 회사에 매각하여 연간 100만 파운드의 임대료로 경기장을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2005-06 시즌 필 브라운은 초보 감독의 한계를 드러나며 강등위기에 몰리자 성적 부진으로 2006년 1월에 경질당했고 유스팀 코치였던 테리 웨슬리가 1군 팀을 맡아 더비는 20위로 강등을 모면했다. 그리고 4월에는 지역 사업가들로 구성된 컨소시엄의 피터 개스비가 클럽을 사들이며 부채를 해결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프라이드 파크 스타디움의 소유권을 다시 되찾았다.
2006-07 시즌 전 프레스턴 노스 엔드를 플레이오프 진출시켰던 빌리 데이비스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 더비는 이적시장에서 수년만에 100만 파운드를 넘기며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었다. 스티브 하워드를 루턴 타운에서 1m에 데려온 것이 5년 만에 발생한 최다 이적료일 정도. 그 외엔 프리미어리그 경력이 있던 웨스트햄의 골키퍼 스티븐 바이워터와 풀럼의 수비수 딘 리콕을 1m가 넘지않은 이적료로 저렴하게 영입했다. 겨울 이적시장에서는 승격 도전을 가속화하기 위해 타이론 미어스와 게리 틸, 제이 맥케블리, 데이빗 존스, 크레이그 페이건, 스티븐 피어슨, 존 매켄을 합계 500만 파운드 이하로 추가영입했다. 떠난 선수는 이디아케스(사우스햄튼)와 토미 스미스(왓포드). 더비 카운티는 당초 승격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며 3위라는 성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25승 중 20승이 1점차 승리일 정도로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며 중후반까지 1위를 질주했으나 막판의 아쉬운 결과로 선덜랜드와 버밍엄에 밀려 3위가 되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 준결승에서 가레스 베일사우스햄튼에 1,2차전 합계 4:4를 기록한 이후 승부차기에서 승리하며 결승에 진출했고 결승에서 웨스트브롬을 1-0으로 꺾고 5년 만에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했다. 하워드는 19골(리그 16골)로 팀내 최다득점자가 되며 더비 올해의 선수가 되었고 2006년 1월에 합류했던 대런 무어는 챔피언십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5년 만에 돌아온 프리미어리그는 가혹했다. 2007-08 시즌 한 시즌 동안 겨우 1승만 거두고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소승점 등 각종 주옥같은 기록들을 쓰고 강등당했다.
2008년부터는 쭉 챔피언십의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았다. 17년을 챔피언십에서 머물던 입스위치가 강등당해 라이벌 노팅엄과 함께 챔피언십에서 가장 오래 머무르고 있다. 2013년까진 평범한 중위권에 머물다 2013-14 시즌부터 승격 플레이오프 단골팀으로 프리미어리그 복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나 번번히 승부처에서 승격이 무산되고 있다.

3. 최근 시즌



3.1. 프리미어 리그 역대 최악의 2007-08 시즌


5년 만에 돌아온 프리미어리그에서 '''1승 8무 29패'''로 승점 11점 20득점 89실점을 기록하며 최하위로 강등당하였다. 게다가 '''역대 최소 승점, 최다 패전, 최소 득점, 최다 득실차를 기록'''하며 불명예 기록을 남겼다.[14] 팀의 유일한 승리를 적선한 팀은 뉴캐슬 유나이티드였다.[15] 6라운드 뉴캐슬전 첫 승리 이후 32경기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며 프리미어리그 최다경기 무승 기록도 작성했다. 승격 이후 안일하게 전력을 보강한 것이 대참사의 원인이었다.
여름 이적시장에서 클로드 데이비스, 로버트 언쇼, 케니 밀러, 앤디 토드, 루이스 프라이스, 타이론 미어스, 베니 페일하버를 영입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뭔가 부실한 영입.
빌리 데이비스 감독이 개막전 포츠머스에 2대2로 비기고 맨시티 원정에서 0대1로 석패할 때까진 괜찮았으나 이후 토트넘에 0대4패, 리버풀에 0대6으로 대패하며 5라운드 만에 15실점으로 꼴찌로 떨어졌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9월 초순이었던 이때 벌써부터 더비의 강등을 기정사실로 여겼다. 6라운드에서 밀러의 데뷔전 데뷔골로 뉴캐슬에게 1대0 승리를 거두지만[16] 아스날과 웨스트햄에 0대5 패배를 당하며 맛집으로 전락해버렸다. 결국 승격을 이끈 빌리 데이비스 감독은 14경기 만에 경질되었고 위건의 승격과 돌풍을 이끈 폴 쥬얼이 새 감독이 되었다.
그의 부임 초기에는 경기력은 나아졌지만 동점 상황에서 막판에 실점하는 버릇 때문에 승점을 자꾸 까먹었고 그럴 수록 조기 강등 가능성은 높아져만 갔다. 겨울 이적시장에서 에마누엘 빌라와 스테조브스키, 스텁스, 로이 캐롤, 로비 새비지, 대니 밀스, 호삼 갈리를 폭풍 영입해보지만 이들 대부분은 전성기가 지나거나 기량이 쇠퇴한 선수들. 챔피언 맨유와의 홈경기에서 선전하며 아깝게 0대1로 패한 경기도 있었지만 결국 아직 3월인 32라운드 풀럼과의 경기에서 2대2로 비기며[17] 6경기 남은 상황에서 잔류권인 17위와 승점 19점차로 벌어져 강등이 확정되었다.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초로 3월에 강등을 확정지은 팀이 되었다. 강등 확정 이후 남은 6경기는 모두 졌고 4점차 이상 대패도 3번이나 당했다. 그러면서 최악의 기록이란 모조리 뒤집어썼다.
최종전 상대는 홈에서 풀럼과 강등권 경쟁하던 레딩을 상대했는데 레딩은 더비에 4대0으로 이겼지만 포츠머스 원정을 떠난 풀럼이 후반 막판 대니 머피의 결승골로 1대0 승리를 거두며 레딩과 더비는 다음시즌 2부리그 동기가 되었다.
강등 이후 2부 리그에서 중위권을 마크하였다.

3.2. 2013-14 시즌


전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스티브 맥클라렌을 감독으로 선임하였고 25승 10무 11패 승점 85점을 기록하며 3위를 차지하여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다. 승격 플레이오프 4강에서 브라이튼 앤 오브 알비온을 맞아 2승으로 가볍게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결승전에서 만난 팀은 4위를 차지한 퀸스 파크 레인저스였다. 90분 동안 줄곧 QPR을 밀어붙이며 승격을 하는가 싶었는데 추가시간이었던 91분 바비 자모라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얻어 맞으며 프리미어 리그 승격에 실패하였다.

3.3. 2014-15 시즌


14-15 시즌은 초반에 매우 잘하고 있다. 7승 5무 1패로 1위를 기록 중이다. 다만 왓포드가 단 1점 차로 추격중이고 8위와 승점차가 5점뿐이라 언제라도 바뀔지 모른다. 30라운드 시점에서는 선두를 미들즈브러 FC에게 내주고 3위로 내려왔지만 1점 차로 보로를 바짝 추격 중이다. 그러나 치열한 선두권 다툼 속에 승점을 많이 까먹어 45라운드 기준 6위로 밀려나 플레이오프 진출권만이라도 사수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46차전 마지막 경기에서 레딩과의 홈경기에서 0-3으로 참패하면서 8위로 추락하면서 다음 시즌도 챔피언십에 남게되었다. 더비로서는 두고두고 아쉬웠는데, 레딩전을 비기기만 했더라도 5~8위까지 다 같은 승점 78점이 되지만 골득실에서 가장 앞서기에 더비가 5위를 확정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3.4. 2015-16 시즌


아쉬웠던 14-15 시즌을 마친 더비는 맥클라렌 감독을 경질하고 레알 마드리드에서 수석코치로 있던 폴 클레멘트를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지난 시즌 임대로 좋은 활약을 보여준 대런 벤트를 자유계약으로 영입하고 레딩이랑 계약이 끝난 아일랜드 국가대표 수비수인 알렉스 피어스, 오스트리아 국대인 안드레아스 바이만을 아스톤 빌라에서, 잉글랜드 국대였던 스콧 카슨을 위건 애슬레틱에서 영입하였다. 그리고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에서 북아일랜드 대표인 크리스 베어드를 영입하였으며, 지난 시즌 헐 시티에서 임대와서 매우 좋은 활약을 보여준 톰 인스를 완전 영입하였다. 그러면서 번리 FC의 주장이던 수비수 제이슨 샤켈을 영입하면서 지난 시즌 불안하다고 지적받던 수비를 강화하였다.
32라운드 기준 승점 51점으로 승격 플레이오프권인 6위를 유지하고 있다.
43라운드 기준 리그 5위, 승점 76점으로 승격 플레이오프 진출이 확정된 상태다. 최종 순위도 5위로 마무리.
4위 헐시티와 플레이오프 4강 경기를 치렀는데 홈에서 0-3으로 대패하여 원정 경기에서 4골 차로 이겨야 하는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2차전에서는 전반에만 두 골을 넣으며 희망의 불씨를 살리려 했으나 아쉽게 후반에서 추가 득점에 실패, 도합스코어 3:2로 플레이오프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3.5. 2016-17 시즌


나이젤 피어슨 감독을 새로 선임하였고, WBA에서 스트라이커 마테이 비드라를 거금 £12.5m에 영입했다. 그리고 핵심 미드필더 제프 헨드릭을 번리에 내줬다. 또한 맨유의 유망주 제임스 윌슨을 임대로 들였다. 겨울 이적시장에는 팀의 유스 출신 에이스 미드필더 윌 휴즈를 왓포드에 내주는 아픔도 겪었다.
시즌 초반 강등권 언저리를 맴돌았는데, 피어슨 감독이 구단주와 심한 언쟁을 하다가 9월 27일 구단 자체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10월 초 피어슨 감독이 해임되었는데, 후임으로 뉴캐슬에서 영 좋지 않은 모습이었던 스티브 맥클라렌을 어쩐 일인지 재영입하였다. 맥클라렌은 선임 후 첫 7경기에서 5승 1무 1패를 거두며 20위였던 팀을 21라운드 기준 5위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약발은 그뿐이었고 들쑥날쑥한 경기력을 보이며 팀은 10위로 추락, 다음 시즌 승강전 진출이 거의 무산되자 매클라렌을 경질하고 전 버밍엄 시티 감독이었던 개리 로웻 감독을 데려오며 사실상 다음 시즌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최종 순위는 9위.

3.6. 2017-18 시즌


로웻 감독이 팀을 안정시켰고 전 시즌 부진했던 마테이 비드라도 살아나며 26라운드 기준 승점 49점으로 2위에 랭크되며 자동 승격을 노린다. 1위 울브스가 61점을 따내고 있어 당장 우승 경쟁은 쉽지 않아 보이며, 3위 카디프와 4위 브리스톨 시티가 승점 47점으로 추격중이었는데, 31라운드 부터 2무 3패의 성적을 찍고 5위로 내려앉았다. 7위와의 승점차가 4점밖에 나지 않는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다.
최종전을 앞두고 7위 프레스턴에게 2점 차이로 6위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최종 라운드에서 반즐리를 4-1로 이기며 자력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였다. 반즐리는 이 경기로 리그 1 강등 확정. 플레이오프 4강에서 최근 기세가 엄청난 3위 풀럼을 상대하게 된다.
5월 11일 홈에서 펼쳐진 4강 1차전에서 베테랑 카메론 제롬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했지만 5월 15일 원정에서 펼쳐진 4강 2차전에서 세세뇽과 오도이에게 골을 내어주면서 총 스코어 1-2로 역전패 당하며 승격이 좌절되었다.

3.7. 2018-19 시즌


플레이오프 패퇴 직후 게리 로웻 감독이 강등당한 스토크 시티로 이적하며 팬들에게 배신감을 안겼다. 공석인 감독 자리에는 대선수 출신 프랭크 램파드가 앉아 커리어 첫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EFL컵 3라운드에서 맨유를 승부차기 끝에 꺾었고, 이로써 MK 돈스, 브리스톨 시티와 같은 경지에 올랐다. EFL컵 4라운드의 상대는 공교롭게도 감독 프랭크 램파드의 친정 팀인 첼시 FC로 결정되었다.
리그는 6위로 마무리지어 승격 플레이오프행을 확정지었다. 준결승에서 리즈를 도합 5:4로 꺾고 아스톤 빌라와 결승을 치른다. 그리고 2대1로 패하여 프리미어리그는 물건너갔다.
입스위치 타운이 리그1으로 강등되면서 노팅엄 포레스트와 함께 챔피언십에서 2008년 이후로 강등이나 승격 없이 가장 오래 머무는 구단이 되었다.

3.8. 2019-20 시즌


문서 참조.

3.9. 2020-21 시즌


문서 참조.

4. 1군 선수단





5. U-23 선수단





6. 라이벌


더비의 라이벌 팀은 노팅엄 포레스트 FC, 레스터 시티이다.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더비 매치이스트 미들랜즈 더비(East Midlands Derby)로 부르고 있으며, 이 경기에서 승리한 팀에게는 브라이언 클러프 트로피(Brian Clough Trophy)[18]가 주어진다.

7. 여담


과거 파울로 완초페, 셰프키 쿠키, 에디 루이스, 레온 베스트 선수가 뛴 팀으로 알려졌다.
유러피언컵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도 승리해본 적이 있다. 하이라이트 1975/76 시즌 우승팀 자격으로 출전한 유러피언컵 16강 1차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홈에서 4:1 대승을 거두었었다. 아쉽게도 2차전에서 1:5로 역관광당하며 8강에는 실패.
이 팀이 전에 쓰던 홈구장의 이름은 '''베이스볼 그라운드'''였다. 더비에 있던 '더비 베이스볼 클럽'이 야구장으로 썼는데, 이 팀은 영국 챔피언을 세 차례나 거머쥔 강팀이었지만 영국의 야구가 망하면서 1898년 해단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들의 야구장을 빌려 쓰던 더비 카운티 축구단이 야구장을 이어 받아 1895년부터 1997년까지 백 년을 넘게 홈 구장으로 썼다.
여성 축구팀도 보유하고 있다.
2019년 10월 9일, 한국인 팬 이씨[19] 가 현지 비비씨 라디오에 출연했다. 2016년에 더비카운티의 팬이 된 이후, 트위터에 꾸준히 리뷰 영상을 올리게 된 것을 계기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20]
2020년 하반기 맨시티 구단주로 유명한 만수르의 사촌이며 2019년 뉴캐슬 유나이티드 인수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던 칼레드 빈 자헤드 알나얀이 더비 카운티를 인수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떴다.

8. 유명 팬


  • 나일 호란
  • 데니스 스키너
  • 그레이엄 콕슨
  • 잭 오코넬[21]
    • 조지 클루니[A]
    • 안젤리나 졸리[A]
    • 카라 델러빈[A]
  • 티머시 돌턴

9. 둘러보기




[1] /ˈdɑːbɪ ˈkaʊntɪ/. Derby의 영국 표준 발음은 /ˈdɑːbɪ/'다비'이지만 관용적 표기를 따른다.[2] 2013년~2016년간 아이프로 스타디움(iPro Stadium)으로 불렸다.[3] 옵션 포함 1000만 £[4] 리그 486경기[5] 북부 리그 득점왕[6] 이후 더비 카운티에 합병되었다.[7] 구장 이름이 베이스볼 그라운드인 이유는 실제로 더비 야구팀이 실제로 야구를 했기 때문이다.[8] 아스널 FC의 팬인 닉 혼비가 쓴 자전적 소설 '피버 피치'를 보면 이 시기의 더비 카운티는 완전무결한 축구를 하는 최강의 팀으로 묘사되어 있다. 반면 당시의 아스날은 꿈도 희망도 없는 시궁창스러운 축구를 하며 작가에게 심적 고통을 안기고 있었다고 서술된다.[9] 준결승 1차전을 앞두고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맞대결이 있었는데, 리즈 돈 레비 감독과 소문난 앙숙이었던 클러프 감독이 "유러피언컵 준결승에 올인하라"는 구단주의 지시를 일축하고 리즈전에 주전들을 몽땅 출전시켰는데, 그 후유증으로 준결승 1차전에서 주전들이 푹 퍼지는 바람에 1-3으로 패한 것이 치명타였다. 역사에서 만약은 없다지만 클러프가 조금만 더 냉정했다면 유러피언컵 우승을 더비에서 먼저 경험했을 것이다.[10] 1984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11] 데릴 파웰, 디온 버튼(이상 자메이카), 야콥 라우르센(덴마크), 이고르 스티마치(크로아티아), 크리스티안 데일리(스코틀랜드)[12] 맨유의 기존 수석코치였던 브라이언 키드가 로이 호지슨이 경질된 블랙번 로버스의 감독이 되었다.[13] 훗날 2007-08 시즌 헐 시티의 구단 첫 프리미어리그 승격과 2008-09 시즌 전반기 돌풍을 이끈 감독이다.[14] 기묘하게도, 이 기록의 승패를 뒤집어 보면 당시 기준으로, 첼시 FC 세웠던 기록(2004-05 시즌, 29승 8무 1패, 승점 95)와 '''똑같아진다'''.[15] 뉴캐슬이 2008-09 시즌 강등으로 2009-10 시즌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던 시즌에도 중하위권의 더비를 상대로 0-3 패배를 포함하여 1무1패를 기록, 더비 징크스를 이어나갔다.[16] 뉴캐슬은 18라운드 홈에선 열린 더비와의 두 번째 맞대결 조차 2대2로 비기며 쥬얼의 첫 승점을 안겨주었다. 뉴캐슬이 더비에게 안겨준 승점이 전체의 36%다. 으메이징[17] 풀럼 역시 뉴캐슬과 마찬가지로 더비에 이기지 못한 두 팀이 되었다. 그나마 풀럼은 2무.[18] 참고로 브라이언 클러프는 더비 카운티와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전성기를 이끌었던 감독으로 포레스트의 UEFA 챔피언스 리그 2연패를 이끈 그 감독이다. 브라이언 클러프의 아들 나이젤 클러프 버턴 앨비언 감독도 2013년까지 더비 카운티를 지도한 바 있다.[19] 모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유저이다. 페이스북 더비카운티 한국 팬 페이지 관리자 이기도 하다.[20] 아마 더비카운티 19-20시즌 문서를 편집하는 유저일것이다. [A] A B C 잭 오코넬의 권유로 팬이 됨[21] 배우